배 혜 경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가정에서 아이가 대학 진학하는 순간까지 부모와 자식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노력합니다. 그것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나 아이의 입장에서나 모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 목표를 부모와 공유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그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을까요? 아이들은 대학에 가 본 적도 없고, 좋은 대학을 나온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깨달을 만한 경험도 별로 없는 상태인데 말입니다. 추측컨대 아이들은 대개 부모로부터, 또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내려 받았을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과정을 관리하는 부모와 그것을 몸으로 실행하는 자식이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하기는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이 그 결과까지 동일한 의미로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한 인격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4, 50대의 성인입니다.

대학 입학은 부모와 자식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위치와 자식의 위치가 서로 다른 만큼 다른 것입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식으로 하여금 바람직한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집니다. 구태여 원한다면 그 임무가 성공적인지 아닌지 평가도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대학 입학의 의미를 부모로부터 여과 없이 내려 받은 아이는 대학 입학의 시점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무를 평가하고, 마무리 지을 확률이 큽니다. 만약 좋은 대학에 입학하였다면 그 아이는 이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잘 끝냈다.'

아이의 입장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일 뿐입니다. 모든 기회가 저절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기회는 보장이 아닙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임무를 마무리한 4, 50대의 정신을 가진 청년은 기회를 활용할 수 없습니다. 아니, 기회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는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자식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부모가 평가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자식이 ‘모든 게 잘못 되었고, 다 끝나버렸다.’라고 자신을 평가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출발점이 그리 유리하지 않을 뿐, 그것이 연결되는 중간점과 도착점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과 한 팀으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때에라도, 부모의 도착점이 자식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